의료비상 사태 해결을 위한 키워드
- ynara2511
- 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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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수정일: 4월 7일
이 칼럼은 2024.09.26일 대한변호사협회 주관 의료비상사태 해결을 위한 토론회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오늘 ‘의과대학 정원 증원 정책의 과정과 절차’, ‘의료 환경의 변화와 의사 수요의 증감’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박형욱 교수님과 석희태 교수님의 발제에 이견을 제시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토론자인 나는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 관점에서 일련의 사태를 분석하고, 그 사태의 근저에 있는 원인과 구조를 읽어내는 현상학적 접근에 동의하며, 발제자가 시간 관계로 충분히 다루지 못했을 몇 가지 사항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의과대학 입학정원 정책은 전문가 의견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의과대학 입학정원 증원과 관련한 의사결정은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 민주주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은 의료의 특수성을 말하면서 전문가의 지식과 경험이 의사결정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는 전문가주의를 주장한다. 전자는 후자와 대립과 긴장의 관계에 놓여 있다. 정부는 의료인력 수급 관련 의사결정에 정부, 소비자, 공급자, 그리고 전문가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민주주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반면, 전문가단체는 의료인력 수급 관련 의사결정은 수많은 불확실성과 가치의 상충이 있으므로 올바른 결정을 위해서 전문가 중심의 의사결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해답은 전문성과 민주성 사이의 그 어느 지점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의료인력 수급 관련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의료계 전문가를 여러 이해관계자의 한 명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들은 우리나라 의료와 의료인력 수급과 관련한 쟁점을 가장 잘 인식하고 해결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을 가진 현장 전문가이다. 또한, 의료계에 종사하는 전문가 대부분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준수하고 국민의 안녕과 환자의 회복을 먼저 생각하는 이타적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다. 비록 소수의 사람이 다른 시각으로 의료인을 바라볼지라도 의사 대부분은 항상 진료 현장에서 환자와 함께 있었으며 국민 대부분은 의사를 신뢰하고 자신을 맡긴다. 이런 이유로 의료인력 수급 정책을 자문하는 일본 의사인력수급분과회, 네덜란드 의료인력계획자문위원회(Advisor Committee for Medical Manpower Planning), 호주 의료인력개혁자문위원회(Medical Workforce Reform Advisory Committee)는 전문가주의 개념에 기초하여 위원의 상당수를 의료계 전문가로 구성하고 있다(일본 22명 중 의사 위원 16명; 네덜란드 27명 중 의료 전문가단체, 의학교육 기관, 보험자 단체 각 9명; 호주 의료 및 학계 전문가, 의학교육 기관, 그리고 의료 관련 협회 대표 등이 절반 이상). 전문가 의견이 중요하게 반영되는 거버넌스가 의료비상 사태 해결의 출발점이다.
둘째, 의사결정 과정은 투명해야 하고, 의사결정자는 책임 의식이 있어야 한다. 투명해야 공정하고, 공정해야 투명할 수 있다. 투명성의 핵심은 의사결정에 사용한 자료와 논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의료인력 수급정책과 관련된 자료, 논의 과정, 그리고 의사결정 회의록이 투명하게 공개되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의료인력 인력 수급 추계에 관한 연구가 비공개로 처리되거나 의과대학 입학정원 증원 의사결정 관련 회의자료와 회의록에 대한 접근이 제한된 경우가 많았다. 정부 관계자는 회의록 작성 의무가 없다고 말한다. 회의자료 또는 회의록이 파기되었다고도 말한다. 어느 시점에 어떤 자료를 공개해야 하는 것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으나, 투명성은 이해관계자 상호 간에 신뢰 구축, 협의와 합의를 만들어 가는 출발점이다. 일본의 의사수급분과회가 2015년 이후 40여 차례의 모든 회의자료와 회의록을 온라인에 투명하게 공개하고 있는 점은 현재 우리 실정과는 너무 상반된다. 투명성은 책임 의식을 높이고 신뢰를 형성하는 좋은 방법이다.
잘못된 의료인력 수급 정책은 의료비 증가를 포함하여 사회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다. 그렇기에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모든 이해관계자는 결정에 따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의료인력 수급정책과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전문성이 떨어지거나 신념과 사명감이 부족한 사람이 종종 있다. 이들은 의사결정 결과에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미래의 어떤 시점에 의사결정 결과에 책임을 갖는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의사결정을 위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근거에 기반하여 신중하고 논리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며, 그러한 결정을 다양한 이해관계자 및 사회와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신념과 사명감을 가지고 의사결정의 결과가 성공적일 수 있도록 지속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 의식이 있는 사람이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셋째, 원칙이 지켜지는 사회, 일관성 있는 의학교육이 중요하다.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원칙을 지키는 사회’라는 말이 화두가 된 적이 있다. 원칙의 핵심은 일관성이다. 일관성은 한마디로 말해 '그때그때 말을 바꾸지 않는 것'이다. 시간과 상황에 따라 원칙이 달라지거나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해 즉흥적으로 원칙이 변경되어서는 안 된다. 원칙의 갱신은 법률을 개정하는 것처럼 평소에 아무 일이 없을 때 충분한 논의를 거쳐 합의되고, 또 떳떳하게 발표되어야 한다. 의과대학 입학정원 증원 정책은 해당 입학 연도의 4년 전까지 대입 정책을 공표하고, 2년 6개월 전까지 대학 입학전형 기본사항을 발표해야 한다는 원칙이 무너뜨린 것이다. 대학은 학생이 입학하는 시점에 그들의 졸업까지 적용받게 될 학칙을 마련하고 있어야 하고, 그들이 이수해야 하는 6년의 교육과정과 비전을 제시하여야 한다. 그러나 2025학년도 의과대학 입학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지금에도 의과대학의 교육은 계획단계이거나 진행형이다. 의과대학 학생 모집 절차가 진행되기 전에 이러한 준비가 선행되고 확인되어야 한다. 선후관계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의과대학 입학정원 증원에 따른 의학교육의 부실이나 질적 수준 하락은 없을 것이라고 하는 단언만 있다. 일부는 학생이 입학한 후 투자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의과대학 입학정원 증원과 관련하여 현 의과대학 학생의 교육 기회가 제한될 수 있음을 지적한 서울고등법원의 판결과 의학교육의 파행과 부실이 명확하다는 의학교육 현장에 있는 의과대학 교수의 의견을 경청해야 한다.
교육부는 의과대학 학생이 제출한 휴학계에 대한 승인을 보류하고, 수업일수 단축, 온라인 강의, 유연 학기제, I 학점 등으로 대표되는 ‘탄력적 학사 운영 가이드’를 제시하였다. 교육부의 탄력적 학사 운영 가이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예외이다. 학칙이 정한 수업일수가 부족한 학생에게는 F 학점이 부여되어야 하고, 교수학습 과정은 엄격하게 관리되어야 하며, 학업성취가 낮은 학생에게는 재학습의 기회를 부여하되 그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을 때는 유급 등 적절한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의과대학은 지금까지 이러한 원칙을 유지하면서 의학교육의 질을 유지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탄력적 학사 운영이 아니라 교육기관인 의과대학이 스스로 만들어 온 원칙에 따라 학생이 제출한 휴학계가 처리되어야 한다.
넷째, 학생과 전공의의 이유 있는 목소리에 대한 경청과 성찰이 먼저이다. 2024년 2월 의과대학 입학정원 증원 정책과 필수의료 패키지 발표 이후 전공의 80.5%가 사직서를 제출하고, 의과대학 학생 72.8%가 휴학계를 제출하였다. 학생과 전공의가 밝히고 있는 요구사항이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전공의 사직 금지는 철회되었고 사직이 이루어졌지만, 휴학계 승인은 이루어지지 않고 학생은 학업의 자리로 복귀할 의사가 없어 보인다. 지금 상황이 계속된다면 25학년도 3월에도 학생 복귀는 불확실하다. 학생과 전공의가 의과대학 입학정원 증원이나 필수의료 패키지 관련 특정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사직과 휴학계를 제출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의과대학 입학정원 증원 정책은 정부의 전향적 자세 변화가 있다면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상황이고 필수의료 패키지는 얼마든지 수정될 수 있는 정책이다. 문제의 본질은 의료인으로서의 미래 비전과 자존감 상실, 우리나라 의료의 구조적 모순, 깨어진 신뢰, 그리고 그들이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절차적 공정성의 부족이다. 실체적 타당성과 절차적 타당성 모두의 결핍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한 성찰 없이 학생과 전공의가 본연의 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는 낙관적이다. 연일 계속되는 정부의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와 말은 좋은 답이 아니다. 성찰(省察)은 마음속으로 깊이 반성하여 살피는 것을 말한다. 사태 해결의 출발은 외부에서 그 원인과 해법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내부의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성찰의 결과를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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