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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교육 철학: 우리는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가?

최종 수정일: 4월 7일


 

양은배(2019). 의학교육 철학: 우리는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가?,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편. 의과대학에서 학장하기


 의과대학 교수는 누구나 자신만의 교육철학이 있다. 철학(philoshophy)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그리스어 philia(사랑)와 sophia(지헤)의 두 단어가 결합된 ‘지혜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 철학에 관한 책을 읽어갈 때, ‘철학은 논리적이고 정당한 방법을 활용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현실 삶의 현장과 관련된 진리의 세계로 인간을 유의미하게 안내하는 도구[1])’라는 설명을 읽어 내려갈 즈음에는 그래도 견디어 볼 만하다. 그러나, 철학은 존재론(ontology), 인식론(episemology), 가치론(axiology)의 기본영역으로 구분되고, 철학의 사조에는 관념론(idealism), 실재론(realism) 그리고 경험론(empiricism)이 있으며, 철학은 분석적(analytic), 평가적(assessment), 사변적(speculative), 통합적(consolidation) 기능이 있다는 부분에 도달하면 언제 책을 접어 책꽂이 한 모퉁이에 놓아두어야 할지 고민이 생겨난다. 교육철학은 이러한 지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의학교육 철학은 교육철학의 연속 선상에 있다.

 

교육철학에 대한 간단한 이해


교육철학은 교육의 의미와 행위를 탐구하는 ‘교육학의 한 분야’이기도 하고, 교육에 대한 견해나 입장에 대해 다루는 ‘교육관으로서의 교육철학’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2]. 학문적 관심이 있는 사람은 교육철학을 중요한 탐구영역으로 생각하겠지만, 교육기관과 현장의 교육자들은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이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 교육관으로서의 교육철학에 더 많은 관심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교육철학은 교육의 방향성에 대한 문제이며, 교육기관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1]. 이것은 자연스럽게 교육과정을 편성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고, 교육철학에 부합하는 교수학습방법과 평가방법이 무엇인지를 제시해 준다. 한 교육기관의 교육철학은 해당 기관이 양성하고자 하는 인재상, 교육목적과 목표,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 교육자의 교육관, 학생 특성의 집합체로서 교육문화(풍토)로 나타난다. 어찌 되었든 교육철학은 우리가 왜 이러한 교육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한다[3].


교육에 관심을 두고 있는 교수라면 한 번쯤은 들어 보았을 교육철학은 항존주의, 진보주의, 본질주의, 사실주의, 실험주의, 실존주의, 분석철학, 비판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및 구성주의와 같은 것들이다. 이러한 교육철학에 대해 하나하나에 관해 설명하기에는 지면의 제한이 있고 교육철학을 다룬 여러 교재가 출판되어 있어 관심 있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놓아도 될 것 같다. 여기서는 오늘날 의학교육 현상을 설명하는데 유효한 본질주의 교육철학과 21세기 의학교육 변화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구성주의 교육철학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자.


본질주의(essentialism): 의과대학에서 본질주의 교육철학을 가진 교수를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930년대에 나타난 본질주의 교육철학은 역사적으로 축적되어온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학문의 기초가 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과 원리를 담고 있는 교과서를 충실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 교수학습 과정에 학생의 자유는 존중될 수 있지만, 지나친 자유는 방종이므로 교수의 통제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그러므로 본질주의 교육철학에서는 대형 집단을 대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강의식 교수법과 훈육이 효과적인 교육 수단이다.


구성주의(constructivism): 일부 의과대학과 의학교육자를 중심으로 구성주의 교육철학에 기초하여 교육을 개선하려는 시도가 일어나고 있다. 구성주의는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난 포스터모더니즘을 교육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적용하려는 일종의 교육 패러다임이다. 구성주의 관점에서 지식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과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되고 해석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지식은 학생에게 주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재된 경험과 인지 활동을 통해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학습에 대한 주인의식, 학생의 자율성, 현실의 실제 맥락에서 학습, 스스로 탐구하고 실험하는 기회, 고등사고 수준의 함양, 협동적 학습환경, 학업 성취에 대한 자신감 고양, 학습 내용과 학습 과정에 대한 학생 스스로의 성찰(메타인지), 수행평가, 포트폴리오 등과 같은 개념은 구성주의 교육철학의 대표적인 키워드이다. 한마디로 구성주의 교육철학은 지식의 구성 주체인 학습자 중심 교육이다. 그러므로 대학은 적극적인 토론, 성찰, 활발한 지식 구성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학습환경을 만들어 주고, 교수는 지식의 전달자가 아니라 지식 구성의 주체인 학생의 학습을 촉진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구성주의 교육철학이 초중등교육을 포함한 고등교육 전반에 확산되고 있다. 교육은 이렇게 진화하고 있다.

 

본질주의와 구성주의 교육철학에 대한 설명을 읽고 나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견해를 가진 의과대학 교수를 만나볼 수 있을 것 같다(물론 다른 견해를 가진 교수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입장의 결론은 같다.


나는 의과대학 교육이 본질주의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회 및 의료환경이 빠르게 변화되고 있지만, 의학, 의료의 본질은 여전히 변화되지 않았으며, 생명을 다루는 의학의 특수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의학지식은 여전히 중요하고 방대한 지식을 효과적으로 학습시키는 방법은 강의식 교수법이다. 구성주의 교육철학의 일부를 의학교육에 제한적으로 적용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나는 의과대학 교육이 구성주의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의학지식의 폭발적 증가와 지식의 유효기간에 대한 문제 제기로 절대적 진리로서의 의학지식에 대한 개념이 변화되었다. 정보통신기술과 교육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지식의 습득과 활용 패러다임을 변화시켜가고 있다. 이제 의학지식을 수동적으로 학습하기보다는 자기주도학습, 성찰, 탐구 및 창의력, 팀워크 등 새로게 요구되는 미래 역량을 키워 주어야 한다. 구성주의 교육철학은 그 해답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의과대학의 리더십과 교수의 교육철학 변화가 먼저 되어야 한다. 특히 본질주의 교육철학이 오랫동안 교육의 근간이 되어 왔던 의과대학 문화를 생각해보면 구성주의 교육철학으로의 전환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구성주의 교육철학의 일부를 의학교육에 제한적으로 적용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의학교육 철학: 우리는 무엇을 지향하는가?


의학교육 철학, 무엇을 지향하는가에 대해 고찰을 할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구분은 우리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첫째는 현재의 의학교육이 어떠한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의학교육은 의과대학과 의학전문대학원에서 이루어지는 기본의학교육(Basic Medical Education), 전공의 수련 과정(Graduate Medical Education) 및 평생교육으로 불리는 지속적 전문성 개발(Continuous Professional Development)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의학교육이 우리나라 의학과 의료를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지금의 의학교육을 교육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우리의 의학교육은 18세기에 형성된 ‘프러시아 교육 모델’을 닮았다. 지식은 과목 단위로 조직되고, 과목은 다시 독립된 단원과 학습 목표로 세분되어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있고, 강의실과 임상실습 현장에서 학생과 전공의의 경청은 최고의 미덕이다. 비판적 사고는 허용되지 않거나 요구되지도 않는다. 특정 의학지식과 술기에 대한 수련생의 기억력을 정해진 시간에 일괄적으로 확인하는 표준화된 시험은 가장 가치 있는 성취도 판단의 기준이다. 나이에 따라 학년을 나누고,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학생과 수련생이 자연스럽게 진급한다. 어느 정도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의과대학의 임상실습 교육이나 전공의 수련교육은 과거의 도제교육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둘째는 현재의 의학교육 철학이 어떤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의과대학은 가장 우수한 지적 능력을 가진 학생이 입학한다. 그러나 얼마 전 졸업한 4학년 학생을 생각해보자. 그들에게는 다른 학생보다 조금이라도 더 좋은 성적을 받는 것이 더 중요했다. 국가고시에 합격하는 것도 중요했을 것이다. 의학에 대해 알아가고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는 즐거움은 잊어버린 지 오래다(모든 학생이 그렇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급당하지 않는 것과 상급 학년으로의 진학이 전부였다. 어떤 의사가 되어야 하고, 자신의 잠재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보다는 인기 있는 전공을 선택할 수 있는지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들은 개업을 염려하고, 미래 수익을 걱정한다. 우리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것들이 오늘날 의학교육 철학이 만들어 내는 의과대학 졸업생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의학교육에서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하는가? 학자들에 따라 의학교육이 어떤 가치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그리고 바탕이 되는 교육철학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공통의 분모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셋째는 의학교육이 어떤 교육철학에 이론적 토대를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합의이다. 어떤 교수는 전통적으로 강조됐던, 그리고 익숙했던 교육철학에 대해 말하고, 또 다른 교수는 새로운 교육철학을 주장한다. 그럼에도 전통적으로 본질주의 교육철학에 기초한 ‘가르치는’ 개념에 기초한 의학교육 모델로는 미래 사회를 대비하는 의학교육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는 공감대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교수들이 경험했던 과거의 사회와는 확연히 다른 양상으로 사회가 변화되고, 미래 사회에서 요구하는 의사의 역할과 역량도 새롭게 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방대한 의학지식의 학습, 환자의 증상, 진단 및 치료와 의학지식을 논리적으로 연결하고 해석하는 것은 인공지능이 더 탁월하다(가까운 미래에 더 뛰어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기술과 시스템은 전례 없는 훌륭한 환자 진료, 의학교육의 도구가 되어 가고 있다. 그렇기에 미래학자들은 의사의 역할이 지식의 암기, 이해, 적용이 아니라 미래 의료환경의 변화와 그에 따라 요구되는 역할을 끊임없이 분석하고(analyzing), 무엇이 가치 있는 일인가를 판단하며(evaluating),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creating), 그러한 가치를 실행에 옮기는 능력(performing)이 요구된다고 말한다. 아울러, 자신이 모르는 것과 알아야 하는 것을 성찰(reflection)하고, 자기 스스로 규제하고 발전시켜가는 메타인지(meta-cognition) 역량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본질주의 교육철학에 기초한 의학교육의 점진적 개선은 미래 사회에 조금 더 적합한 의사를 키워낼 수 있겠지만, 새로운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변화 촉진자를 길러내지는 못할 가능성이 있다. 구성주의 교육철학에 바탕을 둔 의학교육의 새로운 담론과 실천이 필요하다.

 

1. 과거의 지식이 아니라 미래의 변화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


클리브랜드 클릭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에릭 토폴(Eric Topol) 박사는 2011년 M-헬스 서밋 기조연설에서 “청진기가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과거 200년 동안 권위의 상징이 되어온 청진기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보건의료 분야가 그간 너무도 천천히 변화 온 탓에 타성에 젖어 버린,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도 지금까지처럼 천천히 변화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소수의 사람뿐 일 것이라고 말한다[4]. 사람들은 지식의 증가 속도가 가속화되어 2020년에는 지식이 지금의 2배로 증가하는데 73일 정도 걸리고, 2050년에 이르면 지금 통용되는 지식의 단 1%만이 유효할 것이라고 말한다[5]. 구글의 컬처로믹스(culturomics) 프로젝트는 1500년부터 2008년까지 출판된 500만 권 이상의 책을 디지털화하여 지식 클라우드(knowledge cloud)의 가능성을 열었다. 과거로부터의 도출된 의학지식을 학습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다. 또한, 그렇게 학습한 의학지식이 어떤 효용이 있는지도 의아해한다. 의학교육이 새로운 역량, 새로운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 시점이다. 의학교육은 이러한 변화를 준비하는 새로운 의학교육 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의 선정은 과거로부터가 아니라 미래로부터 설계되어야 한다.

 

2. 교육, 연구 및 진료의 융합 교육이 확대되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미래 사회는 연결성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인간과 인간의 연결, 인간과 사물의 연결, 인간과 인공지능의 연결이다. 연결의 핵심은 융합이다. 의학교육이 이러한 연결, 또는 융합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을 하고 있느냐고 질문해 본다면 대답은 분명해진다. 1910년 아브라함 플렉스너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의학교육은 기초 및 임상의학 지식을 학습한 후, 임상실습으로 이어지는 연역적 교육을 강조해 왔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인턴, 전공의 수련 과정에 들어가서야 환자의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경험적 학습이 이루어진다. 지난 100년 동안 의학교육은 이렇게 이론과 경험이 분리되어 교육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의과대학 교육과 전공의 수련교육이 커다란 장벽으로 분리되어 있다. 의과대학의 조직단위인 교실은 그 벽이 높고, 의과대학과 수련병원의 장벽도 높기만 하다. 교수들은 교육에 대해 미래지향적인 대화를 하지 않으며, 이론과 경험을 융합한 통합적 경험은 찾아보기 어렵다. 학생과 수련생들은 자신이 혼자 처리해야 하는 일은 능숙하게 수행하지만, 집단으로 융합 또는 협업해야 하는 과제는 미루기 일쑤다. 협업으로 해야 하는 과제가 제시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식과 경험, 연구와 진료는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의과대학 1학년부터 임상실습을 시작하고 학년이 올라가면서 기초와 임상이 실제 환자 사례를 중심으로 통합되는 귀납적 모델, 창의적인 연구를 통한 이론 학습, 프로젝트 학습을 통해 지식과 경험을 융합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외국의 많은 대학이 의학지식의 폭발적인 증가에 따른 의과대학 교육 기간의 연장 필요성에도, 역설적으로 의과대학 강의를 1년 6개월로 축소하고 6~12개월을 창의적인 연구 역량을 함양하기 위한 기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공의 수련 과정에서 연구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타 학문 분야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그들의 언어와 소통방식을 학습하는 것이 융합이다. 이를 위해 의과대학과 수련병원, 교실 단위의 의과대학 조직, 교수의 전공 칸막이를 없애고 새로운 융합을 시도해야 한다. 의과대학의 교육조직과 병원의 인턴, 전공의 수련교육을 담당하는 조직이 신설되거나 상호 연계되어야 한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준으로 새로운 융합과 연결이 의과대학 및 수련병원 조직 전반에 일어나야 한다. 의과대학의 학생 교육, 전공의 수련교육을 담당하는 사람 대부분이 의과대학 교수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3. 의사의 사회적, 감성적 역량을 함양해야 한다.


지금의 의학교육은 방대한 의학지식의 학습과 환자 진료에 유용한 술기를 함양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의학전문직업성(Medical Professionalism)을 강조해 왔으며, 최근 들어 이러한 역량을 교육하기 위한 교육과정이 마련되고 있지만, 교육은 강의실에서 한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교육 전문가가 충분하지도 않다. 미래 사회는 의료, 의학의 제반 문제가 사회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그렇기에 타인에 대한 공감, 타인에 대한 이해, 의사소통, 협상, 윤리적 태도, 사회적 책무성 등 의사의 사회적, 감성적 역량은 더욱 중요해졌다. 세계경제포럼은 이러한 새로운 교육을 사회적·감성적(Social and Emotional) 교육이라고 표현하였다. 일찍이 핵에너지 시대를 예고한 알버트 아이슈타인(Albert Einstein)은 “인간 정신이 테크놀로지를 항상 지배하고 있어야 한다.”라고 했다. 미국의 유명한 저널리스트 시드니 해리스(Sydney J. Harris)도 “진정한 위협은 컴퓨터가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이 아닌 사람이 컴퓨터처럼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것들은 의학교육이 ‘사회적·감성적’ 역량을 지향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사회적, 감성적 교육은 강의실에서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몇 번의 특강이나 지식 전달로 이러한 영역의 교육적 효과를 기대한다. 의사의 사회적, 감성적 역량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참여적, 경험적 교육이 필요하다. 학생과 수련생들이 이러한 주제에 민감하도록 그들을 의료, 사회 현장으로 내몰아야 한다. 스스로 고민하고 문제를 성찰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4. 새로운 교육 플랫폼과 환경이 제공되어야 한다.


미래 사회에는 어떤 지식과 기술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인간의 사고는 지식을 기반으로 한다. 지식 없이는 창의적 사고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지식이 환자 진료라고 하는 임상 맥락과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 있는 사고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어떤 지식을, 어떻게 학습하는가이다. 앤더슨과 그의 동료들은 지식을 네 가지 수준으로 분류한 바 있으며, 사실적, 개념적 지식보다 절차적, 상황적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6]. 미네르바 스쿨(캠퍼스 없음, 100% 기숙사 생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전문가들이 온라인 교육과정 제공, 플립러닝-개별적으로 지식을 사전에 학습하고, 강의실에서는 토론과 적용 관련 수업), 플랫아이언스쿨(교육과정의 거품을 뺀 12주 전문가 과정 운영) 등은 교육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학생 개인별 맞춤형 학습을 제공하는 드림박스(DreamBox Learning), 뉴턴(Knewton), 리즈닝 마인드(Reasoning Mind)가 개별화 학습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Khan Academy, Ted-Ed, Coursera, Edx. Udacity 등 많은 온라인 플랫폼은 풍부한 자기주도학습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하버드, 스탠퍼드, 듀크 의과대학은 전 세계의 다양한 온라인 의학 콘텐츠를 활용한 강의로 전환하고 있다. 인공지능을 활용한 질의, 응답 시스템을 운영하는 곳도 있다. 벤자민 블룸(Benjamin Bloom)이 일찍이 말한 ‘2 시그마(개별화된 교육은 전통적인 집단 교육을 통한 평균성과보다 표준편차 두 배만큼 앞선다.)’ 문제가 온라인 플랫폼과 인공지능과 같은 기술 발달로 가능해지고 있다. 의학지식을 배우기 위해 강의실에 가야 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Schwartzstein & Roberts는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에서 의사가 되는데 강의가 더는 필요 없다고 했다[7]. 지식의 습득은 개별화된 온라인 플랫폼에서 학생 개개인에게 주어진 책무로, 대학의 강의실은 토론과 협업을 하는 공간으로 변화되고 있다. 이러한 토론과 협업의 공간이 의과대학을 넘어 실제 환자 진료 현장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5. 경쟁이 아니라 협력이 중요한 교육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학생들이 의과대학을 졸업하면서 무엇을 갖고 떠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 의과대학을 졸업하는 한 학생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얼마 전 의사면허국가시험에 합격했으니 이제는 한 시름 놓을 만하다. 의과대학 재학 기간 그렇게 많은 공부를 했지만 대부분 암기했던 내용은 잊어버렸다. 얼마 안 되는 의학지식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실제 환자 진료에 적용하거나 문제 해결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의과대학 시절을 돌아보면,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유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진급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족보를 외웠던 기억만 난다. 다른 학생들을 동료라는 생각해 본 적은 별로 없다. 모두 경쟁 대상이었다. 인턴, 전공의 과정에서도 그럴 것 같다. 나중에 개업하게 된다면 개업 위치를 놓고 한바탕 싸움을 해야 할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빨리 인턴,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개업하고 싶다(의과대학 졸업생 면담에서).”

학생들이 의과대학을 졸업하는 시점에서 어떤 자산을 갖고 떠나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소중한 자산은 그들이 함께한 동료이다. 그들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협력해야 할 동료이다. 의학의 다양한 전공 영역에서,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게 될 친구이다. 의료서비스 과정에서 팀워크는 과거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어떻게 팀워크와 동료의식을 키워줄 것인가. 팀워크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강의실에서 교육하는 것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통합교육과정이나 성과중심 교육과정을 개발하고, 팀바탕학습(Team-based Learning)방법을 도입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평가시스템이다. 학생평가시스템은 학생들의 학습문화를 바꾼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교육과정을 바꾸어도 학생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그들은 단지 진급을 원할 뿐이다. 공부하는 방법도 바뀌지 않는다. 그렇기에 학생들이 동료들과 함께 학습하고, 동료들과 팀워크를 이루지 않고는 학습할 수 없도록 평가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더는 동료들 사이에 누가 더 잘하는지 경쟁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의학교육은 승자만이 살아남아서는 안 된다. 모두가 승자가 되어야 한다.

 

6. 학생들의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이고 어떤 성과를 이루어낼 만한 유능한 사람이라는 스스로의 믿음을 자존감이라고 한다. 낮은 자존감은 우울, 불안, 분노, 공포 등의 부정적 심리 경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 자존감을 가진 학생과 의사는 높은 성과를 도출한다[8]. 안타깝게도 현재의 의학교육은 경쟁 지향적인 문화, 교수-학생 관계 부족, 잠재적 교육과정의 미비, 의과대학생의 삶의 질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학생들의 자존감은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9]. 자존감의 훼손은 자신감 결여,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자책, 사회적 관계망의 축소로 나타난다.

의과대학만큼 시험이 많은 대학이 없다.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자신의 키만큼의 답안지를 작성해야 졸업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현재의 학생평가 제도하에서는 언제나 일등과 꼴찌(상위권과 하위권)가 한 학년에 공존한다. 학생이 하기 나름이겠지만 하위권 학생이 상위권으로 옮겨가는 것은 극히 보기 드문 현상이다. 4년 동안 반복적으로 학생에게 하위권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준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부모들이 자녀에게 12년 동안 끊임없이 너는 하위권이라는 말을 해 준다면 자녀는 어떻게 변화되어 갈까. 그들은 분명 우울, 불안, 분노, 공포 등의 부정적 심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의과대학의 교육이 이러한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이들이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훌륭한 의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하버드대학 심리학과 교수 로젠탈(T.I. Rosenthal)은 칭찬과 격려가 사람의 행동과 성과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을 통해 밝힌 바 있다. 가르치는 사람이 학생에게 거는 긍정적인 기대감이 학생의 자존감을 높이고 잠재력을 발휘하게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피그말리온 효과(Pygmalion effect)이다. 의과대학 교육은 어떠한가. 학생에게 어떤 긍정적인 기대와 격려를 하고 있는가. 학생은 교수들이 긍정적인 기대와 격려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끊임없는 학업의 연속 속에서 돌아오는 것은 부정적인 기대감과 공허한 메아리뿐이다. 의학뿐만 아니라 다른 학문 분야 심지어 의료원 내의 모든 직종의 업무와 학습에도 비슷한 현상이 있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가 하는 의학교육의 현실이다. 멘토의 말 한마디와 긍정적인 기대감이 멘티를 변화시킨다. 위대한 교육자는 학생의 가능성을 보는 사람이다. 그러한 눈을 가진 부모만이 당신의 자녀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 수 있다. 얼마 전 이의용 교수가 ‘스승의 날에 쓰는 교수의 반성문’이라는 글에서 학생을 제자가 아닌 수강생으로 대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 역할을 소홀히 하고 정보와 지식만을 가르쳐온 것을 반성하는 글을 SNS에 올렸다. 생각해 볼 만한 내용이다.

 

7. 학생이 투입하는 에너지의 방향을 전환 시켜야 한다.


의과대학 학생 사이에는 과목이 끝날 때마다 ‘머리를 비워야지 다음 공부를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의과대학에서 공부해야 할양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생은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투입해서 공부만 한다. 그것도 학생이 의사로서 활동하게 될 10년~15년 후에는 쓸모없을지도 모르는 지식을 암기하고 술기를 익히기 위해서 공부한다. 1910년 Flexner보고서가 발간된 이후 의학교육은 학생을 의료인으로 사회화시키는 형성학습(formative learning), 과거로부터 축적된 의학의 다양한 정보를 배우는 정보학습(Informative Learning)을 지향해 왔다. 하버드 의과대학 Macy Institute의 Armstrong과 Barsion은 의과대학 학생이 더는 형성학습과 정보학습에 에너지를 투입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을 한다[10]. 의과대학 학생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가는 변화 에이전트(change agents)로 성장해야 한다. 미래 사회 국가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핵심 인재가 되어야 한다. 의과대학 재학 기간 그들이 가진 다양한 잠재력을 개발하고 변화 에이전트로 성장하기 위한 전환학습(Transformative Learning)을 해야 한다.

학생이 투입하는 에너지를 전환학습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의학교육 방법이 아니라 의학교육 철학의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강의를 어떻게 잘할 것인지, 국가시험에 좋은 성적을 얻게 할 것인지를 뛰어넘는 것이다. 지금부터라 학생의 에너지를 어떤 방향으로 전환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국가의 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사회의 변화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학생들의 에너지가 투입되도록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아직 해결되지 않는 의학의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지적 호기심을 갖고 탐구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한다.

 

마치는 말


세상은 변했다, 과거보다 더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의과대학과 전공의 수련교육은 본질주의 교육철학에 바탕을 둔 보수적 관점을 유지하고, 안정을 추구하고 있다. 아니 의학교육의 철학적 배경이 부족하다고 해야할지 모르겠다[11]. 이일부 변화의 목소리와 개선이 일어나고 있지만,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대안을 마련하는 수준이거나 효율성을 추구하는 수준이다. 미래 사회를 대비한 의학교육은 이러한 교육철학의 개념을 뛰어넘어야 한다. 의학교육의 목적은 의학지식과 기술을 다음 세대 의사에게 전수해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미래 사회를 이끌어갈 의료, 의학 분야의 변화 촉진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성주의 교육철학의 구현을 위한 새로운 혁신과 문화의 조성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1. 신봉호, 전상준, 조혜영, 김회엽, 심현, 서동기. 교육철학 및 교육사. 서울: 정민사, 2017

2. 강기수, 장사형. 교육의 역사와 철학 탐구. 서울: 양서원, 2014

3. 정석환. 교육철학 및 교육사. 서울: 동문사, 2014

4. 박재영, 이은, 박정탁 역. 청진기가 사라진다. 서울: 청년의사, 2013

5. Densen P.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facing medical education. Transactions of the American Clinical and Climatological Association, 2011; 122-:48-58.

6. Anderson LW, Krathwohl DR, Airasian PW, Cruikshank KA, Mayer RE, Pintrich PR, Raths J, Wittrock MC. A taxonomy for learning, teaching and assessing: A revision of Bloom’s taxonomy of educational objectives. New York: Longman. 2001.

7. Schwartzstein RM & Roberts DH. Saying goodbye to lectures in medical school: Pradigm shift or passing fad?. The 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 2017; 377: 605-607.

8. Merrill JM. Depression in medical students: In preply. Journal of the American Medical Association, 1989; 261: 2065-2066

9. Levinsson N. A new situation: Philosophy of education and medical education. Cris Mayo (ed.). Philosophy of education 2013, Chicago: University of Illinois at Urbana-Champaign.

10. Amstrong EG, Barsion SJ. Creating "Innovator's DNA" in Health Care Education. Academic Medicine, 2013; 80: 1-6

11. Ronaghy H. Philosophy of medical education, Journal of Advances in Medical Education & Professionalism, 2013; 1: 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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